악마의 카드<완>

익명
98

그날 밤 난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과거를 잊기 위해 타락을 택하였지만 결국 현재마저 망가진 삶...
난 오랜만에 와이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받지 않았다.
캐나다로 유학 간 딸 설이의 사진도 들여다봤다.
타락한 내 영혼이야 이제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도 그만이다. 하지만 그것과 함께 내가 쌓은 부마저 모두 없어진다면 난 다시 한 번 가족을 외면한 비정한 아버지가 될 것 같았다.

-돈... 내 돈이라도 지켜야 해. 설이에게... 설이에게... 남겨줘야 해.

난 방법을 찾기 위해 미친 듯이 몰두했다.
심지어 궁여지책으로 근처 성당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곳의 신부에게 물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뺏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지만 신부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성당으로 오셔서 기도하세요.”

결국 집으로 돌아온 나는 최후의 선택을 하게 된다.
급히 유언장을 작성해 모든 재산을 딸 설이에게 넘겼다. 공증 따위를 받을 여유는 없었다. 언제 그자가 나타나 내 모든 것을 앗아갈지 몰랐으니까.
그리고 난 다시 그 옛날 나처럼 방 천장에 줄을 매달았다.

-가져갈 살아 있는 영혼 자체가 없다면 계약 자체도 성립되지 않을 게 아닌가. 그래. 맞아. 이 방법 뿐이다.

난 자살을 선택했다. 계약 성립 자체를 무효화하기 위해서...
물론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어떤 것도 담보되지 않은 나만의 결정이고 생각이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내겐 없었다.
그렇게 난 내 목을 줄을 감고 마침내 힘껏 의자를 발로 걷어찼다.

-컥...!

당장에 숨이 막혀오는 고통이 엄습했다.
의식이 희미해질 무렵 누군가의 외침이 들리기도 했던 것 같았다.

-안돼~~!

하지만 난 곧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누군가가 내게 물었다.

“선생님. 왜 그런 선택을 하셨죠?”

난 그곳이 곧 병원임을 알았다.
내게 말을 건 이는 놀랍게도 내가 찾아갔던 성당의 신부.
그가 말하기를, 신부는 내가 성당을 찾아갔을 때 내 얼굴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봤다고 했다. 그래서 몰래 내 뒤를 따라왔고 기어이 내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뭔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고 억지로 끼워 맞춘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무튼 난 신부님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난 내가 죽지 않았다는 것에 한편으로는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분노하는 아이러니한 감정에 빠져 들었다.
그 후 나는 두 세 차례 더 자살 시도를 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그 신부님에 의해 제지되었다.
결국 며칠 뒤, 난 마침내 그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

“그러니까 이 카드가 그 사람이 준 것이라고요?”
“네”
“김준우씨 말은... 그 사람은 악마고?”
“맞아요.”
“좋습니다. 그런데 이해가 안되는게 있네요.. 준우씨 말에 의하면 계약을 위반했으니 준우씨는 이미 죽었어야 하는거 아닙니까?”
“그...그건...”

신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악마는 종종 사람의 영혼을 사들인 후 먹어 치우기도 합니다. 그것은 악마의 영양분이 되어 그들을 존재케 하기 때문이죠. 이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온 일이에요.”

난 신부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뭔가를 알고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신부는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악마는 오염되지 않은 영혼은 먹지 않습니다. 그 영혼들은 대개 천상으로 바로 올라가죠. 그렇기에 그들은 영혼을 타락시키고 더럽힌 후에 빼앗습니다. 그리고 지옥으로 인도하죠. 그 영혼은 영원히 그곳에서 고통을 받게 됩니다..”

난 귀를 기울이며 경청했다.
신부는 계속 말했다.

“악마가 준우씨에게 막대한 부를 준 이유도 그래서일겁니다. 사람의 욕망은 그 자신의 영혼을 더럽힐 수 있는 최상의 재료가 되니까요”
“그래...서요? 전 이제 지옥으로 가겠군요.”
“악마는 준우씨의 영혼을 타락시키기 위해 따님을 이용한 것이죠. 선택지를 던져주고, 자신이 원하는 쪽을 선택하도록...”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니까 그자가 우리 민이를 일부러...?”

신부는 잠시 한숨을 쉰 후 말했다.

“아무튼 준우씨는 그때 선택을 했습니다. 악마가 원하는 결과대로 말이죠. 그리고 곧 준우씨의 영혼도 타락하게 되었죠. 악마는 모든 것을 다 얻었구요.”

난 분노가 치솟았다. 하지만 그 누구를 탓할수도 없었다. 영혼의 타락을 자초한 것은 어찌보면 내 스스로의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악마가 원하는대로 되었는데 아직 내 영혼은 왜 그자의 것이 아닌거죠?”

난 신부에게 물었다.
신부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조건 없는 희생. 그것이 바로 준우씨의 영혼의 이탈을 막은 마지막 성수였습니다.”
“희생...?”
“따님을 위해 스스로의 목숨마저 버린 그 조건없는 사랑과 희생 말입니다. 이런 영혼은 지옥문을 넘을 수 없죠.”

난 비로소 뭔가를 알 것 같았다.
가족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거두려 했던 내 결정이 희생이란 이름이 되어 영혼의 타락을 막은 것이었다.
신부의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며칠이 지나도록 영혼을 가져가겠다던 그자는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어느날 밤 그자를 우연찮게 보게 되는데 바로 내 꿈속에서였다.
그자는 내게 말했다.

“꽤 제법이었어. 계약을 무효로 만들다니 말이야.”

난 그 말을 듣자 환희에 차서 소리쳤다.

“그럼 더 이상 날 귀찮게 할 수 없겠지?”

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뭔가 아리송한 말을 남겼다.

“과거와 현재를 잇게 하는 다리가 있지. 그게 뭘까?”

내가 놀라 잠에서 깼을 때 그자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며칠 뒤 난 반가운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토록 사랑했던 내 딸 설이다.
처음에 난 설이를 볼 면목이 없었다. 하지만 설이는 그런 나를 다정하게 안아주었고 난 그만 오열하고 말았다.

“미안하다 설아. 정말... 미안해.”

난 설이를 품에 안고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확신했다.
신부님의 말처럼 내 희생으로 저주받은 악마와의 계약이 무효화 되었다고 굳게 믿었으니까...
그러나 내 이런 바람은 딸 아이를 품에 꼭 안고 있는 우리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신부님의 얼굴에서 알 수 없는 이상한 기운을 느끼면서부터 서서히 산산조각이 나기 시작했다.

-뭐지 이 불안감은?? 심장은 또 왜 이렇게. 나대는걸까? 신부님의 미소가 이상해. 기뻐서 웃는게 아니야. 흐뭇하게 바라보는 표정이 아니야... 저건 마치... 마치...

난 신부의 미소에서 문득 어린 아이의 미소를 느꼈다.
친구의 장난감을 강제로 뺏고서 마침내 원하는 것을 얻어 만족해 하는 다소 사악한 미소 말이다.
그리고 잠시 후 내 이런 불안감은 곧 그 정체를 드러냈다.
설이가 병실을 나가기 전 내게 이렇게 속삭였다.

“고마워 아빠 살아줘서. 변호사가 그러더라. 유언장 진위 여부가 모호해서 골치 아플뻔 했다는데... ”
“응? 그게 무...무슨...?”

의아하여 묻는 내게 설이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녀는 신부에게 물었다.

“녹취 끝났죠? 유언장 직접 작성했다는거 제대로 녹음되었겠죠?”
“물론입니다. 자매님.”
“그럼... 이제 이 카드도 내 것인가?”

그녀가 품속에서 카드 한 장을 꺼냈다. 그것은 바로 이 모든 비극을 초래한 검은색 그 카드였다.
설이는 품속에서 커다란 썬글라스를 꺼내 썼다.
그리고 내게 손가락 총을 겨누며 마지막 말을 던졌다.

“상속 고마워요. 아 참.. 병원비는... 아빠가 알아서 해야할 것 같네. 내가 사정상 지출이 불가해서...”

난 그 순간 심장이 얼어붙고 말았다.
설이는 깔깔거리는 유쾌한 웃음소리를 남기고 사라졌다.
그리고 신부는 마지막으로 내게 말했다.

“상속이란게 참 재밌죠? 과거의 어둠과 현재의 빛을 단단하게 이어주는 다리...! 심지어 계약까지 말이죠.”

난 그때 비로소 모골이 송연해지고 말았다.

“이봐...이...이봐...”

난 떨리는 목소리로 신부님을 불렀다.
하지만 그는 어느덧 그곳에 없었다.
대신 신부님이 아닌 내겐 익숙한 그자와 웃음소리와 목소리만이 병실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계약 인수 축하해 김설씨.”
“안돼...아아아아.... 안돼~~! 내 딸만은 안돼....”

내 절규는 오랫동안 병실에서 메어리쳤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내게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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